대표 작품 및 오디오 가이드 

Acrylic, color pencil, pastel, pencil on korean paper, 15.8×22.7cm, 2023

Acrylic, color pencil, pastel, pencil on korean paper, 112.1×162.2cm, 2023

Acrylic, color pencil, pastel, pencil on korean paper, 80.3×116.8cm, 2023
* 오디오 가이드는 널위한문화예술 & 사적인컬렉션과 함께합니다.
BIOGRAPHY
2023
MA.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서양화전공
2020
BA.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SOLO SHOW
2023
<불균형한 것들을 나는 좋아해> 행궁길갤러리, 수원
GROUP SHOW
2023
<굳이 떠올리는 유난> 군포문화예술회관, 군포
<Way Back Home> 넥스트뮤지엄, 서울
<나래전> 갤러리일호, 서울
2022
<청년터전> 고색뉴지엄, 수원
ARTIST STATEMENT
몸은 여러 영역을 유영하거나 횡단하는 주체이자, 반대로 다양한 영역이 넘나드는 매개적 장소이다. 나는 여러 영역에 걸쳐 있거나 해체되는 몸을 포착하고 조합하며 무의식을 향한 여정을 그리며, 이는 몸의 표피를 찢어 내부 영역에 천착하는 초현실적인 행위로 매개된다.
여러 영역 간의 경계에 걸쳐 있거나 난입/난출하는 몸은 달리고 구르고 뛰어내린다. 이는 시・공간의 법칙을 서로 공유하지 않는 여러 영역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몽상과도 같다. 꿈에서 깬 후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일, 꿈과 현실을 오가며 비가역적 변화를 맞이하고, 분실과 획득을 반복하는 일과도 같다. 반대로, 다양한 영역이 넘나드는 몸은 자폐적인 상태로 무의식을 유영하는 몸이자, 몽상가, 익사자의 정지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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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몸을 바라보았을 때 다양한 영역이 그를 넘나드는 장면을 볼 수 있다면, 그 몸체를 내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여러 영역을 유영하고 횡단하는 몸이 등장한다. 해부 과정에 있던 몸의 표피를 걷어낸 후 내부를 향한 시야를 획득한 것이다. 정지된 몸과 움직이는 몸은 다른 영역들과 함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갈래의 경계를 허물거나 결합해 보는 등의 표현을 시도하기도한다.
내 작업은 다의적이고 대립-공존적인 관점을 전제한다. 해체 및 재구성되는 몸과 영역이라는 조형적 특성과 마찬가지로, 실재와 상상, 외부와 내부, 줌-인과 줌-아웃의 시점, 삶과 죽음, 육신과 유기체 등의 대립항을 연결한다. 이러한 탐구는 닿지 못할 무의식 영역에 대한 갈망과 기다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 포착할 수 없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일과 궤를 함께한다. 이처럼 몸이 해체되고 변형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함축적인 서사와 감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ENG
The body is an entity that swims or traverses through various realms, and conversely, a mediating space that various realms cross. I capture and assemble bodies that exist across multiple domains or are disassembled, depicting a journey towards the unconscious, mediated by the surreal act of tearing away the body’s surface to delve into the inner realms.
Bodies that lie or burst across the boundaries of various realms run, roll, and jump out. This is akin to a fantasy freely crossing the borders of multiple realms that do not share the same laws of time and space. It’s like recounting a dream upon waking, transitioning between dream and reality to face irreversible changes, and experiencing a cycle of loss and gain. Conversely, the body that traverses different realms is one in an autistic state, swimming in the unconscious, a body of a dreamer, a frozen body of a drowner.
From an external viewpoint, one can see the scenes of various realms passing through the body, whereas from an internal perspective, the body that swims and crosses these domains emerges. It is like gaining a vision directed inward after peeling away the body’s surface during dissection. The still body and the moving body exist in an organic relationship with other realms. I attempt expressions that dismantle or combine these two kinds of boundaries.
My work presupposes a polysemic and antagonistic-coexistent perspective. Just as with the sculptural characteristics of bodies and domains that are disassembled and reassembled, it connects opposing elements such as reality and imagination, exterior and interior, zooming in and out, life and death, flesh and organism. Such inquiry aligns with the longing and waiting for the unreachable realm of the unconscious, the imagination towards the unknown, and the desire to depict the undetectable. Through this, I aim to convey the implicit narratives and sensations that arise from the process of the body being disassembled and transformed.
CRITIQUE
시선으로 긋기: 심예지의 회화 작업에서 가로지르는 것은 곧 나누는 것
– 콘노 유키 –
1. 심예지의 화면 도해하기
한 화면 안에 어떤 장면이 그려진다. 여러 명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이 무기질적인 공간적 구조 안에서 미동을 남긴다. 심예지의 회화 작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장면’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주변이 그려져, 구도적인 연출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무대와도 같은 공간적인 구조 안에 신체가 들어와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가 노출되어 있거나 신체 일부가 여러 개 조합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대상들이 교란된 모습이나 파괴된 모습보다는 형태를 유지한 채 독립적인 모습으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곱게 자란 자식>은 건축적 구조, 이를테면 원근법적인 환영의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이 틀을 깨부술 정도로 넘치는 힘이 외부로 분출되거나 화면 전체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가까이서 보면 묘하게 엉켜 있고 틀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대상은 흙으로 돌아가는 부패 과정도 내적 폭발도 하지 않은 채 화면 속에 잘 있다. 바꿔 말해, 이는 공간적인 구조 또한 독립적인 존재감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평면적으로 색이 입히거나 흰 바탕을 남긴 영역은 대상을 옥죄고 뒤틀리게 영향을 미치는 틀과 달리, 배경에 머무른다. 이처럼 작품에서 대상과 배경은 서로 무관심한 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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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양자가 무관하지 않은데, 대상과 배경은 독립적이고 정태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로 스치듯이 만난다. 평면적 배경에 남은 얼룩,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한 손 모양만 보이는 팔, 어떤 대상을 그리려는 듯한 드로잉의 선이 화면에 ‘남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어떤 대상이 되어 가는 중이나 일어날/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단서나 흔적처럼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 화면 안에서 공간적 구도와 인물을, 인물 사이를, 그리고 한 신체의 피부와 내부가 비밀스럽게 만나는 접점을 만든다. 배경에 가깝고 동시에 대상에 가까운 흔적들은 미결정(未結晶)의 상태에서 ‘어떤’ 것으로 이끄는 힘을 가진다. 추상적인—이차원적인 선이나 평면적으로 칠해진 영역이 있고, 구체적인—인물의 사실적 표현과 공간적인 깊이는 덩어리진 살의 표현이나 날것에 가까운 물감의 물성으로 덮이는 대신, 구분과 접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2. 살로써의 존재가 아닌 남은 선에서 출발하는 것
심예지의 회화 작업을 분석하기에 앞서 묘사—어떻게 보면 ‘도해(圖解)’에 가까운—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면, 작가 본인도 ‘도해’나 ‘해부(解剖)’라는 말을 쓰는 이유도 물론이지만, 그의 작업에서 인체와 공간의 만남을 ‘시각적으로’ 바라보고 그림에 옮기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체와 공간을 마주했을 때, 시각적인 도해와 해부는 선에서 출발한다. 그의 회화는 몸에서 피가 튕기거나 콘크리트 분진이 날아오르지 않는, 재료나 물질보다 시각(視覚/視角)에 초점이 맞춰진 탐구심의 발현된 모습이다. 신체와 그림의 관계를 두고 볼 때, 심예지의 그림은 그 전체를 살이라는 비유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살은 피부와 힘이 내-외적으로 함께 움직여 동력을 발생하는, 덩어리진 것/곳이다. 그와 달리 작가는 살을 시각적으로 가르는 선을 통해서 동력을 만든다. 그의 작업 과정을 피부의 절개라고 해 보자. 이 비유가 적절하다면, 곧 인물의 묘사와 재현, 그리고 종이라는 평면의 공간적 구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선을 긋는다’라는 표현은 작품 화면에서 두 가지 의미로 작용한다—하나는 회화의 기법, 다른, 아니 ‘또 하나’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뜻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회화 작업, 적어도 연필이나 붓을 드는 작업에서 선을 긋는 행위는 기본적이다. 드로잉과 같은 자유로운 선도 있고, 건축적 구도를 원근법적으로 재현하는 뚜렷한 선도 있다. 이 선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직선 아닌 곡선이라고 해도, 여기에는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생각이나 마음이 있고, 인물의 윤곽이나 투시도법에 근거한 공간이 평면에 환영적으로 깊이감을 조성한다—그러면서 배경과 대상은 뚜렷이 구분된다. “이것이 공간이고, 그것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평면에 그려진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개념적으로 구별 가능해진다. 그러나 둘은 사실상 한 평면 위에서 동시에 전개/절개된다.
3. 평면을/에 칼질하기
평면이라는 매체적 조건에서 심예지의 회화는 선을 긋는 일을 통해서 전개와 절개를 한다. 그 결과, 평면은 ‘(구별 전 상태인) 무엇이 되어 감’과 ‘(구별된) 무엇임’의 사이를 가로지른다—횡단하고 동시에 구별한다. 여기서 절개, 바꿔 말해 ‘칼질’이란 언어적 은유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구분의 생성과 접점을 시각적으로 동시에 표시한다. 가령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에서 읽어낸, 감각들의 원초적 통일성1)과 심예지의 회화 작업은 성격이 다르다. 설령 두 화가가 공통적으로 인물을 다루고 변형되는 신체를 그린다고 해도 말이다. 베이컨의 회화에서 흘러내리는 표현들은 눈, 코, 입처럼 각 기능을 가진 부위가 뭉개지고 하나가 된, 살(flesh)의 존재를 보여주는데, 심예지의 회화 작업은 화면의/속 시각적인 분리와 함께 연결로 이끈다. 심예지가 ‘평면’에 접근하는 방식은 살을 빚어내고 날것인 살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절개를 통해서 만드는 움직임이다. 이는 곧 붓질과 스케치, 드로잉에 의한 선과 평면이라는 매체적 조건 사이에서 칼질하여 만든 굉장히 시각적인 접근에 의한 넘나듦이다. 그의 작업에서 선은 회화에서 평면과 깊이감을, 대상과 배경을 구분하는 데서 출발하면서 동시에 접점이자 분리를 표시하여 남긴다. 피부를 투과한 뼈, 공간적 구조 너머 살짝 보이는 머리, 물결 치는 듯한 평면은 가려짐(숨어 있음/구분됨)과 동시에 드러남이다. 회화 속 장면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틈을, (서사는 물론,) 보다 근본적으로 선을 긋고 이를 흔적처럼 남기는 평면이라는 매체적 조건이자 기법에서 시작하여 이미지로 만든다. 그의 회화에서 가로지르는 것은 곧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부분들의 연결은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절개에서 출발한다. 출발한다는 표현은 곧 어딘가로 향한다는 말인데, 직선적인 힘은 화면을 분할하여 대상이 들어오는 무대 장치를 만들며 즉흥적인 곡선은 어떤 형태를 잡는 윤곽이 되어 대상을 그려나간다. 여기에는 살처럼 날것에 머무르는, 말하자면 정돈되지 않고 자유롭고 통제되기 어려운 힘이 ‘그대로 있는(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힘이 점차 잘 다듬어지는 과정을 담기도 한다. 예컨대 인물상과 겹친 선은 또 다른 인물의 모습 혹은 같은 인물이 움직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인체 내부에서 도는 힘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특히 <곱게 자란 자식>(2023)에서 두드러진 이 선의 특징은 바깥에서 내부를 포획하는 윤곽선이자 동시에 내부에서 돌아가고 움직이는 힘이 대상을 이룬다는 두 시선으로 쪼개진다. 이 선은 업는 자세로 서 있는 두 명—내지 한 명, 혹은 여러 명을 외곽선을 통해 인물상으로 만듦과 동시에 안에서 뼈대처럼 지탱하고 연결한다.
4. 꿰뚫음의 실
(그러면서도, 여기서) 쪼개짐은 대상과 배경을 물감이나 그 물성에서 획득된 날것의 표현으로 산산조각으로 만들지 않고 레이어가 다층적으로 쌓인 표현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작가는 디지털 드로잉을 반복해서 한 작품을 만드는데, 디지털 디바이스 평면에 구상한 장면을 그림에 옮겨, 그 그림을 다시 사진으로 찍고 이 위에 디지털 드로잉을 겹친다. 작품을 보고 느껴지는 안정감, 이를테면 한 장면 안에 대상이 잘 들어와 있고 그것이 어느 순간 배경과 스치듯 만나는 구도는 통제와 번지거나 선이 뻗어가는 즉흥적인 흔적들은 같은 평면에 여러 번 칼질하는 행위를 디지털 디바이스와 종이 위에서 여러 번 반복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만약에 작가가 살의 존재에 집중을 했다면, 한 화면—종이와 디지털을 여러 번 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뼈나 골격이 드러난 신체라는 재현 대상은 그 주제에 반해 표현과 보는 사람에 자극을 유발하지 않는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나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를 비롯한 초현주의 작가의 회화가 떠오르는 텅 빈 공간 속의 인물 배치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전율을 느끼는 ‘으스스함’과 다르다. 보는 사람과 그 사람이 보는 것 사이에 공명하는 신체적 떨림이 살에 근거한, 존재를 향한 호소력이라고 한다면, 심예지의 작품은 엑스레이(X-Ray) 촬영처럼 물질마저도 관통하는 시선으로 대상과 배경을 꿰뚫는다. 이 꿰뚫음의 실이야말로 평면 작업의 붓질, 선, 그리고 서서 만들어지는 환영적 공간과 재현이다. 이 차이를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작가가 말하는 ‘몸의 해체’가 (계속 강조하듯이) 베이컨 회화의 살도 아닐 뿐만 아니라 불교회화, 그 중 육신에 대한 탐욕심을 일깨우기 위해 인체가 부패하는 장면을 그린 ‘구상도(九想圖)’과도 다름을 짚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고 나서, 신체가 썩어 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어 그린 이 회화에서 다루는 ‘해체’ 역시 베이컨의 살처럼 보는 이의 육신을 향한다. 구상도를 보고 느낀 전율은 나 자신의 육체의 불순함과 허무함으로 향하여 수행을 통해서 극복된다.) 비록 유사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심예지의 작업의 핵심은 베이컨이나 구상도와 결을 달리 한다. “나는 여러 영역에 걸쳐 있거나 해체되는 몸을 포착하고 조합하며 무의식을 향한 여정을 그리며, 이는 몸의 표피를 찢어 내부 영역에 천착하는 초현실적인 행위로 매개된다”라고 작가가 설명할 때2),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다고 혹자는 생각할 것이다—해체는 어떻게 걸칠 수 있을까? 해체되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지 않을까? (두 가지 의미로) 걸친다면 이것저것 파편을 그러 모아 반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살처럼 덩어리지지도—바꿔 말해 다양하게 가공할 수 있는 날것의 재료로 접근하지 않으면서도, 피부처럼 전체를 감싼 상태 아닌, 여러 영역에 걸칠 수 있는 방법을 작가는 시각적인 접근에 찾아본다.
5. 시선의 쪼개짐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설명처럼,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공간적 구도와 표현 대상인 인물은 어떤 융해나 융합도 없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심예지의 해체와 걸치기는 보다 근본적인 회화 작업의 조건에서 출발한다. 평면에 선을 긋는 일이야말로 앞과 뒤, 즉 대상과 배경을, 더 나아가 ‘겉’과 ‘속’의 이어져 있음을 회화 평면/공간에 표시해 준다. 작가가 “외부에서 몸을 바라보았을 때 다양한 영역이 그를 넘나드는 장면을 볼 수 있다면, 그 몸체를 내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여러 영역을 유영하고 횡단하는 몸이 등장한다”라는 말로 설명할 때3), 시선이 양쪽에서 쪼개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부에서 봤을 때와, 내부에서 봤을 때, 이 두 시선이 향하고 겹치는 곳이야말로 사실상의 소실점이다. 이 소실점이란 아무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들어설 수 없는 공허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점을 출발점 삼아 이끌면서 이미지를 겹겹이 그려나간다. 다시 생각해 보니, 시선 또한 선이다. 눈, 즉 시각으로 그어진 선은 평면 위에서 우연적이거나 규칙적인 선을, 면과 형태를, 대상과 배경을 공존시킨다. 화면 안에서 인물과 건축적 구조가 날것이 되지 않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동시에 던져진 시선이 평면에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각적인 접근은 석사 청구전 《해부・봉합》4)(2022)에 소개된 이전 작업에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작업에서 작가는 화면 안에 대상이 이동하는 모습과 대상이 분해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담았다. 이전 작업에서 물리적인 이동과 시간적인 흐름이 작품마다 각각 시각적으로 담겼다면, <곱게 자란 자식>이나 〈Lotus(Pressing)〉(2023)을 비롯한 최근 작업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오히려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형태가 언제 부서질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선들이 언제 형태가 될지도 모르는 전개가 유보된 채 평면에 머무는 힘을 담는—끄집어 내어 그리는 일 대신—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6.수술대 위의 손
초점은 평면을 향한다. 수술대 위에서 받는 시술처럼, 피부에 선으로 표시해 그 부위를 칼질하여 내부를 들여다보고 이를 만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초점이 물질의 파괴를 (그야말로) 겨냥하지 않고, 내부에 침투하기를 바라는 시선 때문이다. 동시에 살이—이를 만지는 이 또한 비명을 듣지 않고 전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마취에 걸린 살은 평면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감도는 에너지나 뼈대처럼 받쳐 주는 구조가 아예 소실된 것은 아니다. 그려진 평면 위의 소실점 아닌 평면이라는 소실점을 향하여, 작가의 시선은 현실과 꿈이 실현되는 장으로 평면을 다시 만진다. 수술대 위에서 고정되고 안정된 상태에서 시선을 보내는 의사나 환자의 시선이 교차한다. 어쩌면 작품에서 인물들의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거나 무언가를 향해 내밀거나 뻗치는 부분적 모습은, 통제와 통제할 수 없는 평면이라는 무대를 마주한 작가의 손일지도 모른다—외부에서 열기도, 내부에서 열기도 하는, 두 시선이 향하는 손길.
각주
1) 질 들뢰즈, 하태환 옮김, 『감각의 논리』, 민음사, 2008, p. 55
2) 심예지의 작업 설명 중에서.
3) 위와 같음.
4) 물론 이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당시부터 아무것도 없어지는 ‘해체’ 대신 ‘봉합’ 가능성을 담은 ‘해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연장선상에 2023-2024년에 작업한 회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