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진태
BANG Jintae

b.1984

채집된 산수 | 2024 | 한지에 채색 | 90.9×72.7cm

채집된 산수 | 2024 | 한지에 채색 | 50×162.2cm

채집된 산수 | 2025 | 한지에 채색 | 50×150cm

Biography

  • 2016 목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 박사 수료
  • 2016 Mokwon University, Graduate School, Department of Fine Arts, Ph.D. Completed

Exhibition

  • 2022 개인 <산수채집>, 보이드갤러리, 대구
  • 2017 개인 <방진태개인전>, 모리스갤러리, 대전
  • 2016 개인 <방진태개인전>,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 2014 개인 <방진태개인전>, 이공갤러리, 대전
  • 2011 개인 <방진태개인전>, 이공갤러리, 대전
  • 2022 Solo <Sansu Collection>, Void Gallery, Daegu
  • 2017 Solo <Bang Jintae Solo Exhibition>, Morris Gallery, Daejeon
  • 2016 Solo <Bang Jintae Solo Exhibition>, Ganainsa Art Center, Seoul
  • 2014 Solo <Bang Jintae Solo Exhibition>, igong Gallery, Daejeon
  • 2011 Solo <Bang Jintae Solo Exhibition>, igong Gallery, Daejeon

Critique

방진태의 ‘보보관(步步觀)-자연을 걷고 채집하다’

방진태의 산수화는 ‘보보관(步步觀)’이라는 자신만의 산수(山水)를 대하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보보관(步步觀)’은 말 그대로 ‘걸음걸음마다 본다.’라는 뜻으로 자연을 정적인 대상으로 감상하고 관념화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시선으로 감상하고 경험한 대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걸음마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을 관찰하고, 동시에 자아를 성찰하는 태도를 함유하고 있다. 산수를 관념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매일 다르게 변화하는 자연을 바라보는 일상의 경험 속에서 축적되는 감각적 흐름을 작품에 반영한다. 방진태는 과거 문인들이 자연을 관념적인 이상향으로 삼아 산수를 그렸던 것에 머물지 않고, 자연을 관찰과 시각적 채집 대상으로 삼아 산수를 편집해 그린다. 전통 산수화의 보편적 틀과는 결이 다른 관점과 표현 방식으로 산수를 재해석하며, 관람자에게는 산수화의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인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방진태가 화제로 삼은 ‘채집된 산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산수 채집’은 나비나 곤충을 채집하여 표본 액자(실제 작가의 작업실에는 나비와 곤충을 채집한 표본 액자들이 걸려있다)를 만들 듯, 자연의 아름다운 요소를 하나둘씩 채집하며 다양한 산의 본체를 모아 그린다는 의미이다. 즉, 실재하는 자연 공간을 걸으며 바라보고 체득한 경험과 감정을 ‘채집하듯’ 하나의 화면에 집약해 표현한다는 의미에서의 ‘산수 채집’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채집된 산수’라는 개념이다.‘채집된 산수’는 작가가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자연-산수의 다양한 모습을 선택적으로 채집하여 구성한 결과물을 지칭한다. 전통 산수화에서 자연-산수는 관조의 대상으로서 작가와 일정한 거리감을 지닌 대상이었다면, 채집된 산수는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재편집이 가능한 대상이다. 작가는 관찰자이자 수용자로서 자연을 만나는 존재가 되어 직접 경험하고, 감각하고, 개입하여 산수-자연을 화면에 재구성한다. 이때 작가가 선택한 산수-자연은 더는 자율적인 자연이 아니라, 작가의 의지에 따라 배열되고 재구성된 피동적 풍경인 ‘채집된 산수’가 된다. 그의 작품 중 140개의 각기 다른 산의 형상을 그린 작품이나 서가에 산을 수석처럼 놓아 표현한 <채집된 산수>(50.0×116.8cm, 한지에 채묵, 2021) 작품이 그 의미를 한층 명확하게 알려준다. 140개의 산의 형태를 작은 크기로 그려놓은 <채집된 산수>(77.0×56.0cm,종이에 채묵, 2022)를 보면 작가의 기억이나 손끝에 익숙한 산의 형상을 채집하여 나비나 곤충을 표본 액자로 만드는 것처럼 표현했다. 특히 산수 형상을 입체로 만들어 표본 액자에 넣은 작품들은 곤충표본액자처럼 채집된 산수를 표현하고자 한의도가 분명히 드러낸다. 궁극에 방진태의 ‘보보관과 채집된 산수’는 자연을 관조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 체득한 순간순간의 예술 창작의 관점과 태도를 작품에 반영한 자연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관은 방진태만의 관념 산수를 형성하는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한다. 2020년 이후의 작품을 보면 정형 산수화에 가까운 화면구성이 반복된다. 이 시기부터 운필(붓질)을 연구하며, 수묵 작업에 몰입했던 <회색도시> 연작이나 먹물의 흘러내림의 우연성과 만난 자유롭고 직관적 붓질 위에 정교하게 묘사한 자연 풍경을 덧입힌 <산수-담아내다> 연작들과 조형적 구성에서 거리를 두게 된다. 예컨대 <산수-담아내다>(130.3×162.2cm, 한지에 채묵, 2015) 작품과, 2017년 모리스 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소나무가 있는 산수>(145.5×112.1cm, 한지에 채묵, 2017), <난초가 핀 산수>(97.0×130.3cm, 한지에 채묵, 2017) 작품 등에서 보여주던 정교함이나 자유분방한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 구작에 견주어 가장 큰 변화는 형상이 명확해진 부분이다. 산의 형세, 그 속에 표현한 대상들이 분명해졌다. 반면, 구작의 특징인 우연성, 모호성, 자유로움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을 버렸다. 왜일까? 붓질을 통해 자연의 생명력, 구조감, 그리고 정신을 담아내려는 것은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구작의 특성을 버리고, 정형화된 산수로 변화를 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한 이유와 의미는 근작에 나타난 표현형식에서 어느 정도 찾아진다.

2020년 이후 방진태의 산수화는 크게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흰 여백에 보고 싶은 산세만 오려서 붙인 듯 다양한 모양의 ‘청록산이 표현된 형식’과 산에 밀착해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화면 전체를 ‘청록숲으로 채우듯 표현한 형식’이다.

첫 번째, ‘청록산이 표현된 형식’은 <채집된 산수> 연작에서 주를 이룬다. <채집된 산수> 연작은 산의 형상만 오려낸 듯한 조각적 형상의 산이 여백의 공간에 섬처럼 떠 있는 존재로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산의 주변에 넉넉한 여백을 살려서 산이 마치 시간과 공간에서 떠 있는 듯하다(판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경-중경-후경의 특별한 구분 없이 단일 산세의 덩어리가 산맥을 중심으로 좌우 수평구도로 펼쳐진 형상이 많다. 제작 과정을 보면, 밑그림 없이 먹으로 산의 형세를 직관적으로 그린 후 그 위에 분채를 덧입히듯 나무와 숲을 필점으로 그렸다. 습관적 형상을 멀리하기 위해 밑그림이나 드로잉 없이 미리 제작한 다양한 크기의 화면에 직관적으로 표현 한다.

여기서 직관적 표현의 형상으로 삼은 특별한 본보기는 없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재차 생긴다. 그의 작업실 벽면에 붙어있던 정선의 인왕제색도 인쇄물을 떠올려 보아도 연결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인왕제색도는 작품에 담긴 기운생동과 겸재가 성취한 독자적 예술성을 닮고자 한 의도로 읽힐 뿐 근작과의 연결점은 약하다(구작과의 연관성은 분명하다). 근작의 산 형상은 오히려 16세기 전반의 서문보, 이장손, 최숙창 등의 산수도(山水圖)를 비롯한 작자 미상의 여러 산수도의 산 형상들과 더 연관 있어 보인다. 마치 산 부분만을 오려낸 듯. 운무에 둘러싸여 산이 공간에 떠있는 듯한 부분만을 오려내 현대적 감각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러한 전통 산수화와 의도적 연관성을 배제하면, 방진태의 산수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보편적 산 형상에 가깝다. 지극히 평범한 산의 형상이다. 이는 방진태의 산수화에 유명산이 등장하지 않는 점과도 연결된다. ‘이름 없는 산’(無名山)들이지만, 산의 형상은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익숙하게 다가온다. 평원법을 중심으로 산세를 안정감과 균형감에 있게 표현하여 원거리의 산수를 명상적이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유도한다. 결국, 방진태가 관념 산수로 변화를 꾀한 것은 ‘채집된 산수’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의 일상에 오래전부터 함께 했던 자연-산수에 거부감 없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태를 안겨주기 위함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고향의 산을 ‘자연스럽게 수렴되거나 받아들여진 상태’의 형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는 오롯이 하나의 산세가 화면 중앙을 차지하도록 구성함으로써 그 존재적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주변과의 관계로서의 산이 아닌, 존재적 대상으로 산을 강조하려는 의도성이 짙다. 극사실적 묘사를 자제하고 형태의 본질만 남긴 단순화된 표현 방식은 바로 하나의 독립된 산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응시하고, 각 산이 지닌 고유한 존재를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이는 <채집된 산수>가 작가 자신의 자아 형상들과 겹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의 상황에 모습은 바뀔 수 있다 해도 본질적으로 ‘산’이라는 존재, 즉 자신의 본질과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동시에 작가로서 꿈꾸는 이상을 정형화된 형식으로 구체화하고 싶은 내면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읽힌다. 이와 함께 <채집된 산수>의 산 형상들이 기억에 쉽게 자리하는 것도 관념 산수로 변화를 추구한 이유라면,그 의도는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두 번째 ‘청록숲으로 채우듯 표현된 형식’은 <사유의 숲> 연작을 통해 나타난다. 한마디로 <채집된 산수> 속으로 들어간 풍경이다. 원경으로 표현한 산은 그 산속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나 근경으로 숲을 밀착해서 그린 형식은 채집된 산수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확인 가능하다. <채집된 산수> 연작을 멀리서도 산의 형상을 감지할 수 있는 판화처럼 선명한 구도를 갖추고 있다고 했는데, <사유의숲>은 멀리서 보면 오히려 청록계열의 색면화에 가깝다. 한걸음, 한걸음 다가설 때 비로소 숲을 이루는 자연 생명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고양이, 호랑이, 자전거, 그리고 사람이 가까이 다가설 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작고 섬세하게 그려졌다. 지극히 객관적 비례로 그려졌지만, 결국 존재적 진실은 표면적, 외형적 드러남이 아닌 깊이 응시하고 깊이 다가설수록 그 안에 내재한 숨어있는(혹은 감춰진)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은밀하게 보여준다. 한편, 색채는 청록색 계열을 중심으로 옅은 갈색, 연한 붉은색을 가미하여 계절감이 느껴지게 한다. 화면을 지배하는 청록색은 자연의 색을 넘어 생명과 번영, 평온의 싱징적 메시지로 다가온다. 특히 평온함은 세속적 유혹에서 벗어난 자연 본연의 고요한 울림으로 방진태의 산수화에서 감지되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산과 바위, 숲이나 나뭇잎은 주로 점준(點皴)을 활용한 준법(皴法)으로 화면에 리듬과 생동감을 부여했다. 단순한 붓 터치로 산의 표면, 산세를 가로 흐르는 폭포수를 표현하였다. 이처럼 제한적 색과 점준을 활용한 붓 터치로 숲과 나무의 질감을 촉각적으로 표현하고, 화면에 부분부분 숨어있는 재치는 <사유의 숲>에서 찾을 수 있는 방진태 산수화의 또 하나의 특징이자 구작과 다른 요소로 꼽을 만하다.

이상 살펴본 두 형식은 표현 방법과 보이는 형식만 다를 뿐, 상호 깊게 연관되어 있다. <채집된 산수>가 기억과 형태의 조합으로 구조적이며 다분히 조형적이고 시각적이라면, <사유의 숲>은 내면세계의 확장에 대한 관점으로 감성적이며 심층적이다. 그래서 <사유의 숲>은 기억과 형태보다 생각과 감정의 밀도가 더 많은 층위를 이루고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의 측면에서 보면 <채집된 산수>는 조각적이며, 여백과 함께 하나의 독립적 공간을 지키고 있다면, <사유의 숲>은 정적이고 연속적이다. 어디가 끝이고 시작인지 모호하고, 끝없이 펼쳐진 숲은 곧 사유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자신에게 일어난 뜻하지 않은 일도 깊은 사유의 시간을 통해 보면 그 내면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신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사유의 숲>을 작가 정신의 공간으로도 볼 수 있는 근거이다. 결국 <채집된산수>와 <사유의 숲>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인간이 자연을 ‘대면’하고 ‘접속’하는 방식, 다시 말해 마주하는 방식에 따라 보고 느끼고, 사유하는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郭熙)는 산수화를 “마음속에 있는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을 그리는 것(胸中丘壑)”으로 정의하며, 인간이 동경하는 자연은 화가의 내면에 형성된 자연관의 표현으로 보았다. 이는 곧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마음속에 담고 있는 자연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을 일컫는다. 반면,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오감으로 즐기고, 그 체화된 기억과 상상력의 조합으로 창조한 것이다. 즉, 일상에서 직접 경험한 자연과의 교감을 시각의 의존에서 벗어나 심상으로 재구성할 때 관념적인 풍경보다 창조적인 풍경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방진태의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실경의 체험을 바탕으로 산수를 직관적으로 표출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진경산수화의 태도를 공유한다.

결론적으로 방진태의 산수화는 진경산수의 체험적 태도를 지니면서도 그 표현은 관념 산수의 형식을 취한다. 자연을 삶 속에 채집하듯 일상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하는 산수-자연을 자신만의 조형 문법으로 하나둘씩 표본화해 나간다. ‘보보관’과‘채집된 산수’는 자연을 걷고 채집하며, 자연과 자아 사이의 거리를 좁혀가는 방진태만의 자연관을 담고 있다.

종필(미술평론가, 前제주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