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
- 2011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 학사
- 2011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RISD), Illustration, BFA
Exhibition
- 2023 개인 <높고 낮음, 흐름, 깊고 얕음>, 정부서울청사 갤러리, 서울
- 2019 개인 <그들을 잃어가는 이야기>, 서울시립미술관, 세마 벙커, 서울
- 2018 개인 <달팽이 인간>, 제주문화예술재단, 예술공간 이아, 제주
- 2025 단체 <Unfold>, 아트센터 화이트블록, 파주
- 2021 단체 <Heal the World>, OCI 미술관, 서울
- 2023 Solo <The Study of Height, Depth, and Flow>, Gallery in Government Complex-Seoul, Seoul
- 2019 Solo <The Story of Losing Them>, SeMA Bunker, Seoul Museum of Art, Seoul
- 2018 Solo <The Snailman>, Art Space IAA, Jeju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Jeju
- 2025 Group <Unfold>, Whiteblock, Paju
- 2021 Group <Heal the World>, OCI museum, Seoul
Critique
정진, 감각의 장으로서의 회화 — 유동하는 표면과 마음의 지층
변종필(미술평론가)
읽기의 전제
정진 작가의 회화는 평평한 캔버스 위에 어떤 특정 ‘이미지’를 재현하기보다, 물감이 흘러내리고 번지고, 또 멈추는 과정의 흔적을 그대로 남기는 데서 출발한다. 이 표면은 물처럼 유동적인 인상을 주지만, 동시에 퇴적층처럼 ‘쌓인 시간’을 노출한다. 화면 위에 남겨진 붓질의 흔적, 자연을 닮은 초록 색조, 물감의 농도와 두께, 그리고 스밈과 마름의 차이로 서로 다른 밀도와 리듬의 다층적 감각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흘러내림·번짐·멈춤의 차이는 미세한 단차와 깊이감을 만들고, 관람자는 한 번에 ‘읽어내기’보다 그 차이를 따라가며 변화가 축적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무엇이 그려졌는가’에서 ‘어떻게 흘렀고 어디에서 멈췄는가’에 시선이 끌리게 된다. 정진 작업은 완성된 이미지보다 형성되는 과정 자체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정진은 자신의 작업을 ‘OTC(질서–틈–순환)’라는 틀로 설명해 왔다. 예술은 작가의 의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가장 먼저 해석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글쓰기와 작업을 동일시하는 정진 작가의 태도를 고려할 때 OTC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유효한 해석의 틀로 삼을 만하다. OTC는 결과물의 ‘의미’를 단정하기보다,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를 제시하는 하나의 장치이다.
질서(Order)
작가는 유동하는 표면을 ‘질서’로 명명한다. 더하여 ‘높고 낮음, 흐름, 깊고 얕음’을 질서의 기본 규칙으로 삼는다. 여기서 질서는 무엇을 위로 올리고 다른 것을 아래로 내리는 위계의 의미가 아니다. 높이는 구상적 원근이 아닌 반복된 행위가 쌓이며 형성된 층위이며, 흐름은 서로 다른 점성을 지닌 물감이 캔버스를 따라 남긴 흔적이다.
건조 시간이 다른 아크릴과 유화 재료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틈과 골짜기, 즉 깊이가 다른 ‘표면의 지층감’은 그가 말하는 질서를 이루는 조형 요소이다. 아크릴이 물의 증발로 마르는 매체라면, 유화는 기름의 산화로 서서히 굳어가는 매체이다. 이러한 차이는 화면의 시간성을 다르게 만든다. 아크릴이 표면의 흔적을 단속적으로 고정한다면, 유화는 흐름 자체를 지층처럼 축적하며 시간의 깊이를 생성한다. 그렇게 화면은 높고, 낮고, 깊고, 얕음의 흐름을 만들고 스스로 자리를 잡는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입자와 얼룩, 맺힘과 번짐이 우연처럼 흩어져 보이지만, 한 걸음 물러서면 그 우연들이 하나의 리듬으로 조합된다. 정진의 질서는 바로 그 물감의 흩어짐과 조합이 동시에 성립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속성이 다른 재료의 건조 차이로 섞이는 부분과 분리된 부분으로 나뉘지만, 그 나뉨이 분열로 끝나기보다 화면 전체에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균형과 유동하는 중심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이 점에서 정진 회화의 ‘질서’는 빈틈없이 정렬된 규칙이 아니라, 재료와 행위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만들어낸 조율이다.
틈(Teum)
틈은 질서 안에 벌어진 ‘사이’다. 틈은 균열이자 통로며, 때로는 숨구멍처럼 작동한다. 이때 틈은 결함이나 실수가 아니다. 틈은 질서를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질서를 갱신하기도 한다. 회화에서 틈은 먼저 표면의 경계로 나타난다. 물감이 흘렀다가 멈춘 자리, 붓의 압력이 달라지며 결이 바뀌는 지점, 서로 다른 재료가 맞닿되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자리. 이 작은 경계들이 화면의 사건을 만든다. 그렇게 틈은 결핍이 아니라 전환의 지점이 된다.
특히 회화와 함께 설치되는 뜨개 오브제는 ‘틈’을 공간 경험으로 확장하는 핵심이다. 뜨개는 개별 올이 연결되어 전체 구조로 확장되는 방식으로 완성되는데, 그 연결 사이에 자연스럽게 틈(구멍)이 생긴다. 이 틈은 그냥 빈 공간이 아닌 관계의 불완전성과 단절 가능성을 지니면서도,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생성의 공간이다. ‘없음(구멍)’은 결핍이 아니다. 비어 있음 자체가 감상과 사유의 여지를 만든다. 뜨개 설치작품의 드리워진 섬유 덩어리와 벽면의 빈 공간은 바로 이 틈을 구조적(실의 규칙), 공간적(통로와 거리), 호흡적(숨 쉴 구멍)으로 경험시키는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때 관람자는 회화의 경계와 뜨개의 틈이 만들어내는 ‘사이’를 체감하는 존재가 된다. 회화와 뜨개를 병치한 설치에서 작품과 벽 사이의 거리, 직물이 드리우는 곡선, 비어 있는 벽면을 이동하며 ‘틈’을 경험할 수 있다. 2025년 선보인 <틈>이란 작품에 이러한 특징이 반영되었다. 멀리서 보면 반복 패턴이 질서로 보이고, 근접할수록 매듭·단절·구멍이 드러난다. 다시 물러서면 전체 흐름이 새로운 질서로 재구성된 것을 마주할 수 있다.
뜨개는 벽에 단단히 고정된 장식이 아니라, 접히고 처지고 다시 솟아오르는 물성으로 공간을 흔든다. 넓게 남겨진 벽의 여백과 직물의 곡선, 이를 잇는 느슨한 선들은 하나의 ‘통로’처럼 공간을 열어두며, 관람객의 시선과 몸의 이동을 부추긴다. 작가가 뜨개를 회화와 연결하여 배치한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뜨개질은 반복되는 손의 움직임 속에서 시간과 기억이 축적되며, 동시에 관계를 엮는 행위이다. 다양한 색실들이 한 올 한 올 이어지며 개별에서 전체 구조로 확장되는 연결성은 세상의 구조를 닮았다. 그 연결 사이에 형성되는 틈(구멍)은 세상의 존재와 존재 사이, 예컨대 개인과 타인,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자연과 자연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간극과 다르지 않다. 세상의 구조는 촘촘히 연결되었더라도 어느 한 지점의 끊김으로 쉽게 불완전해질 수 있다.
뜨개질은 회화와 다르게 특정한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다. 일상의 틈이 생기면 손의 움직임만으로 감각을 엮을 수 있다. 특별히 기능성을 지향하지 않아도 된다. 정진의 뜨개는 확정된 형태를 갖추기보다, 몸에 밴 손의 기억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그러면서도 뜨개질은 구조를 만들고, 감각을 밀어내는 힘과 스스로 통제가 개입되는 틈이 된다. 결국, 뜨개는 관계의 구조를 상징하며, 그 본질에 대한 사유를 이끄는 유효한 모델이다.
순환(Cycle)
순환은 질서와 틈이 반복되는 구조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질서(O)가 틈(T)을 통과하며 변주되어 다른 질서(O)로 갱신되는 과정이다. 반복은 완성의 회귀가 아니라 갱신의 운동이다. 정진의 순환 세계에서는 ‘불변하는 완성’의 존재 대신 ‘감각의 지층’이 쌓인다. 회화에서 붓질과 흘러내림이 레이어를 만들고, 그 레이어는 다시 새로운 순환 조건이 된다. 2025년 작 <달은 순환한다> 연작은 캔버스의 형태로부터 화제까지 자연 순환의 시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
순환의 논리는 뜨개의 구조에서 더욱 유효하다. 뜨개질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의 장력, 손의 떨림, 시간의 개입 등으로 매 순간 보이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매듭과 구멍이 생기고, 연결과 단절이 교차하는 순간마다 미세한 구조적 변이가 발생한다. 순환은 동일성의 복제가 아니라 차이를 품은 반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뜨개의 시작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순환을 추상적 개념이 아닌 구체적 시간의 층위로 전환시킨다. 그의 뜨개는 병상에 계신 어머니 곁에서 심신의 안정을 위해 다시 잡은 손의 행위에서 출발했다. 그 행위는 애도의 언어이기도 하고, 붙들어야 했던 일상의 리듬이기도 하다. 그래서 뜨개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지속과 기억이 물질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뜨개는 손이 움직인 시간만큼 구조가 남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회화의 유동하는 표면과 뜨개의 결이 호응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둘 다 ‘기억을 그린다’기보다 ‘기억이 남는 방식’을 만든다.
미적 경험은 작품이 엮어낸 의미의 장들 속으로 들어갔을 때 가능하다. 문제는 작품의 끌어당김의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 강도에 달렸다. 예술 작품의 감상은 물리적·물질적 층위뿐 아니라 비물질적 층위까지 지각하게 된다. 정진의 작품을 통한 미적 경험도 다르지 않다. 그의 작업 앞에서 관람자가 수행할 감상법을 단계적으로 정리하면, 멀리서 전체를 보며 큰 리듬(질서)을 읽고, 가까이 다가가 표면의 경계(틈)를 따라가며, 다시 물러서서 방금 본 틈을 포함한 전체를 새롭게 되짚는 방식이다. 이 움직임이 반복될 때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순환하는 감각의 장으로 전환된다. 물론, 이 순환이 언제나 새로운 생성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반복 속에서 스스로 고정시키는 응결에 머물게 될지는 작가나 독자에게 열려 있는 문제로 남는다.
살펴본 대로 정진 작업의 세계관을 OTC로 규정할 때,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규칙(높낮이·흐름·깊이)은 화면에서 질서로 조직되고, 그 질서 안에서 경계·균열·통로·숨구멍으로서의 틈이 발생하며, 그 틈을 통과해 질서가 다시 갱신되는 순환의 구성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정의 과잉이든 결핍이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힘의 분배’를 조율하는 태도다. 물감은 흐르되 방치되지 않고, 정지하되 봉인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유동하는 중심이 만들어지고 다시 흔들림이 되풀이될 때 질서를 조율하는 힘의 분배가 관건이다. 자신의 창작 행위는 ‘대단한 것 말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질서, 일부러 줄 세우고 좌우로 정렬하는 그런 것 말고,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그렇게 되어지는 질서에 대한 공부’라고 한 작가의 말과 맥락적으로 연결된다.
하나의 예술 작품 안에서 물질과 감각, 의미들이 결합되어 고유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은 그 작품의 자율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들이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정진 작품은 화면의 균형이나 배치보다 평면에서 물감이 어떻게 시작되고, 충돌하고, 멈추는가의 관계 구조를 탐구한다. 이는 곧 세상의 모든 이치와 관계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물질, 시간, 감각의 세 층위가 반복되는 창작행위를 통해 매번 새로운 발견을 쌓아가는 그의 예술 행보에 주목할 만한 이유이다.
결론적으로 정진의 작품은 화면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는지와 관람자가 어떻게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지를 함께 조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고정불변의 정답 찾기가 아닌, 질서가 만들어지고 틈이 벌어지는 이치, 시간과 기억이 축적되는 방식, 그리고 그 틈에서 질서가 새롭게 정리되는 순환의 경험을 축적해 가고 있다. 그 경험이 반복되고 쌓일수록 작품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갱신되는 마음의 지층’으로 남을 것이다.
1) 정진은 대기업을 퇴사하고 로드 아일랜드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2011년 졸업 후, 계속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과 방법으로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며 글 쓰고 미술을 한다. 정진 글·그림, 『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일상, 영감의 트리거』, 디페랑스, 2023, 프로필 인용.
2) http://www.jungjean.com/artistsstatement.html / ‘질서(Order)’는 구조(과거와 현재를 지배하는 + 미래에 건립되는)를, ‘틈(Teum)’은 그 안에 벌어진 사이를, 경계·구멍·변곡점으로, ‘순환(Cycle)’은 이 질서와 틈의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한다.
3) 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강조한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의 개념과 연결지을 수 있다. ‘반복이란 고정된 원본의 재현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강도(intensity)와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역동적 운동’이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정진의 뜨개질은 특정한 형상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내적 필연성에 의한 무념무상의 손놀림 반복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미세한 차이의 변주를 지닌다.
4) 정진의 뜨개질은 병실에서 어머니 곁을 지키던 시간 속에서 시작되었다.(2026.3.12. 인터뷰) 어릴 적 어머니가 작가를 위해 떠주셨던 뜨개물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어머니를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가장 일상적인 재료(털실)와 단순한 방식(겉뜨기)으로 이루어진 이 행위는 어느 순간부터 작가에게는 기억과 사랑, 그리고 지속되는 인연의 감각을 물질화하는 서사를 담은 매체가 되었다.
5) 정진 글·그림, 『미술가 정진C의 아무런 하루-일상, 영감의 트리거』, 디페랑스, 2023, p.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