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graphy
- 2023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석사 재학
- 2023 Present Sungkyunkwan University, School of Art, MFA
Exhibition
- 2024 개인 <소품과 소품들>, 코스모 40, 인천
- 2020 개인 <광기_우리가 만든 연극>, 서리풀갤러리, 서울
- 2024 단체 <부평영아티스트 선정작가>, 부평아트센터, 인천
- 2024 단체 <도도그랜트>,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 2024 단체 <4인4색>, 갤러리 선, 서울
- 2024 Solo <Prop and Props>, Cosmo 40, Incheon
- 2020 Solo <Crazy_The Play We Made>, Surrey Pool Gallery, Seoul
- 2024 Group <Bupyeong Young Artist Selection>, Bupyeong Art Center, Incheon
- 2024 Group <Dodogrant>, Art Space The Necessaries, Seoul
- 2024 Group <4 People 4 Colors>, Gallery Sun, Seoul
Critique
오려낸 기억: 사물과 공허의 잔여, 재생성의 서사
정찬용(독립 큐레이터)
이지웅의 작업은 일상의 표면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물과 풍경을 새롭게 불러내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 속 장면을 처음 마주하면, 얼핏 버려지거나 방치된 듯 보이는 물건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 나 이 사물들이 담고 있던 원초적 맥락과 경험들은 이미 과거에 사라졌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작 가가 제시하는 “오려진 기억”이라는 개념이, 이 대상들을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새로운 서사의 시발점으로 바꾸 어 놓기 때문이다. 이때 관람자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연스레 참여하게 되고, 동시에 이미 지나갔 다고 여겼던 사건이 현재 삶 속에 재출현하는 순간을 체감하게 된다. 이는 그저 오래된 물건을 보여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억 자체가 끊임없이 재배치되고 재맥락화된다”는 사실을 예술적 형식으로 드러낸다.
흔히 기억은 완결된 형태로 보관되었다가 필요할 때 소환되는 것으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지웅은 그런 단선적인 기억 개념을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오려진 기억’이란, 말 그대로 이미 한 차 례 소모되거나 지워졌다고 생각했던 흔적을 다시금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오려 내어’ 현재로 호출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기억은 단지 지난날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 시점에서 새롭게 구성되어 독특한 내러 티브를 형성한다. 예컨대 시위가 끝난 뒤 남겨진 의자나 확성기는, 그 현장에서 소음과 사람들의 에너지가 빠져 나간 뒤에야 비로소 전면에 떠오르며, 작가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무대의 주연으로 격상된다. 그 잔재적 대상 은 과거가 완전히 닫힌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열려 있는 사건의 일부임을 암시하며, 새로운 맥락에서 이뤄지는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 의미를 생성해 낸다.
“오려진 기억”이라는 말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진이나 종이를 실제로 ‘오려’ 붙이는 물리적 기법을 떠올리게 한 다. 하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진짜 핵심은, 기억이 본래부터 흩어져 있는 파편들이라는 점이다. 잘 다듬어진 서 사로서 과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조각나 있을 뿐이고, 예술가 는 이 파편을 수집·재배열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관람자는 사물들 사이를 넘 나들며, 원래 맥락에서 분리되어 나온 대상들이 왜 이런 모습으로, 이런 배열 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고민 자체가 기억을 재생성해 내는 통로가 된다. 남아 있는 것, 혹은 남아 있다고 인 식되지조차 못했던 것이 작품 안에서 다시 발화할 때,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만들어 내는 미묘한 공감각적 경험이 발생한다.
이지웅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특정 사건의 ‘주인공’보다 그 주변부에 놓였던 사물이나 잔해, 흔적을 더욱 조형적 중심에 배치한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실존주의적 명제1와 절묘하게 겹친다. 본질이 확립되지 않은, 혹은 이미 그 본질을 상실해 버린 사물이 작가의 시선을 만났을 때, 전혀 다른 가능성과 의미를 획득한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대상의 의미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과 맥락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이지웅의 작업에서 낡아 버린 술병 더미는 애초에 소모성 물건에 불과했을지 모 르나, “대화의 예열이 필요할 때”라는 제목이 부여되는 순간, 그것은 대화의 부재나 인간관계의 갈등, 혹은 연 대감의 필요성과 같은 보다 큰 맥락을 암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에어컨 실외기는 “충정로에서 열심히 일하는 기계”라고 명명되어, 이미 기능을 다한 지도 모르는 기계가 어떤 의지를 지닌 존재처럼 환기된다. 이러한 ‘본질 부여’ 행위는 상징이나 은유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사물의 본래 맥락을 지워 버리는 동시에 새로운 기억의 계기 가 되도록 만든다.
사물이 본디 지니고 있던 기능적 의미가 결여되거나 모호해졌을 때 느껴지는 낯섦은, ‘도구적 존재(Zuhandenheit)’가 제 기능을 잃었을 때의 현상2과 자연스레 맞물린다. 도구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는 그 존재 자체가 투명하게 사라지지만, 기능이 상실될 때 비로소 그 도구 자체가 우리에게 현존하게 된다. 원래는 특정 기능을 수행하며 제자리에 있던 물건들이, 그것이 사용되던 문맥에서 이탈하면 오히려 그 자체로 더 선명하게 두드러 진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확성기나 마이크 스탠드는 군중의 함성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무기력하게 보이는 동 시에, 관람자의 상상력을 한층 더 자극한다. 다시 말해, 원래 역할이 박탈된 도구는 그 부재를 통해 본질을 재 점검하게 하고, 동시에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받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 과정을 통해 관람자는 도구가 잃어버린 ‘원래의 자리’를 떠올리고, 그 사이에 놓인 공백을 메우는 서사를 스스로 구성해 나가게 된다. 결국 이 낯섦이 작동하기 위해선, 과거의 기억이 오히려 파편화된 형태로 스며들어야 하며, 작가는 이를 “오려낸 기억” 이라는 이름으로 표면화한다.
이러한 기억의 파편화는 단지 물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나간 자리나 특정 사건이 남긴 분 위기, 혹은 삭제된 역사적 단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위 현장에서 실재했던 뜨거운 열기와 함성은, 특정 시간 의 흐름이 지나면 기계처럼 ‘켜고 끄는’ 방식으로는 되살릴 수 없다. 그 대신, 버려진 의자나 확성기의 흔적이 새로운 시각적 매개로 재등장함으로써, 그 열기와 함성을 ‘상상적 차원’에서 복원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적으로 생성된 사건은 공동체의 되살아남기(survivance)3를 통해 당사자들이나 군중이 떠난 뒤에도 실재하는 잔여를 통해 한 번 더 현재화되는 과정을 밟는다. 공동체는 완전한 합일이나 융합이 아닌, 서로의 차이와 간격을 유지 한 채 공존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지웅의 작업에서도 사라진 공동체의 흔적들은 완전한 복원이 아닌, 그 부 재와 간격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이때 단순히 ‘과거가 이렇게 있었다’는 서술을 반복하기보다는, 그 빈자리에 서서히 가라앉는 정적(靜寂)이 다음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버려지거나 소진된 것으로 보이는 사물과 풍경이 작품의 중심에 놓였을 때, 관람 자와의 상호작용이 훨씬 풍부해진다는 사실이다. 소음이 사라진 스피커나 행인들의 발길이 끊긴 거리의 표지판 같은 것은, 그 자체로는 공허해 보이지만, 그 공허가 바로 새로운 “서사의 기회”가 된다. 관람자는 “왜 이런 장 면이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과거의 소음이나 군중을 그려 보기도 하고, 혹은 전혀 다른 개인적 기억을 투영시키기도 한다. 이는 “오려진 기억”이 지향하는 바, 즉 관람자가 수동적으로 기억을 ‘전달받는’ 대신 적극적으로 기억을 ‘재창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상태를 교묘하 게 어긋나게 함으로써, 그 틈새에서 기억이 다시 발화하는 순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의 경험과 상상력은 빠져나간 소음이나 시간의 텅 빈 공간을 채우게 되며, 그로 인해 작품이 완성되는 또 하나의 서사가 생성된다.
“주변부가 중심이 되고, 중심이 흔들린다”는 해체론적 관념4 역시 이 맥락과 맞닿는다. 해체론은 기존의 위계 질서와 이항대립을 뒤집고 해체하는 사유방식으로, 중심과 주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역사 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중심에 있는 서사를 강조하고, 주변부는 그저 부수적이며 소모적인 요소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지웅은 오히려 그 주변에 놓여 있던, 혹은 남겨져 있던 사물·풍경을 ‘오려’ 내어 작품의 전면에 세운다. 그리고는 낯선 제목을 덧붙여 주목을 환기한다. ‘열광의 순간’이 아니라 그 뒤에 남겨진 ‘열광의 잔재’를 통하여, 작가는 그 열광 자체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종국에는 소리 없는 풍경이 전하는 미묘한 여운을 더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런 역전은 기존 질서나 위계를 전도시키며, 그로부터 의외의 의미가 솟아오른다. 원래 사건이 끝났다고 믿는 지점에서부터 예술적 재해석이 시작되고, 관람자의 머릿속에서 과거는 끊임없이 반복 재구성된다.
이렇듯 “오려낸 기억”이라는 개념은, 기억이 ‘완성된 형태로’ 과거에 저장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관념에서 벗어 나도록 만든다. 사실 기억은 늘 조각나 있으며, 새로운 맥락을 만날 때마다 형태를 바꿔 가며 살아남는다. 따라 서 이 파편적인 흔적들이 불현듯 촉발될 때, 관람자는 그 사건을 다시 음미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는 단지 과거를 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킴으로써 과거에 대한 관점마저 새로이 바꾸는 경 험이기도 하다. 수많은 술병이나 버려진 기계 장치가 가지는 상징성은, 원래의 기능적 역할과는 완전히 무관해 보이지만, 작가가 기입하는 은유적 제목이나 설치 방식에 따라 생생한 대화의 장이 되기도 하고, 고독을 체현한 하나의 인물이 되기도 한다. 그때 관람자는 내면에 잠재된 기억의 파편들을 사물에 투영함으로써 또 다른 서 사를 완성해 나간다.
이러한 서사 형성에서 작품의 제목과 재료 선택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속내”, “의지” 같은 간단한 단어 한 줄이, 그 물건이 가진 낯설고 해체된 맥락을 한껏 부풀린다. 관객은 ‘이렇게나 평범하거나 낡은 사물에 왜 저런 강렬한 단어가 붙었을까?’라고 궁금해하며,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잠시 잊혀졌던 누군가의 목소리, 혹은 한 시절의 특별한 공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제목과 설치, 그리고 사물의 잔 재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장은, 관람자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자유롭게 호출해 낸다. 이런 방식은 기억이 고정 된 형태의 서사라기보다, 여러 겹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가변적 실체’임을 보여 준다. 사물에 원래 부여된 이름 이나 기능은 이미 희미해졌고, 이제 새로운 이름과 역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오려낸 기억”은 바로 그 전환 의 순간을 가시화하는 장치다.
나아가, 남겨진 사물이나 빈 공간에 작동하는 ‘정적'(靜寂)은 단순히 소음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사건을 준비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축제가 끝난 뒤의 광장, 파업이 끝난 후의 도로, 혹은 모임이 해산된 뒤 남겨진 술 자리 테이블 등은 모두 현재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지웅의 시선 아래, 그 자 리는 새로운 시간축으로 접속한다. 과거의 군중과 함성, 혹은 속삭임과 웃음소리가 여전히 잔존하듯, 그 공허 속에 기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공허’를 긍정적으로 전유해, 물건들을 마치 활발하게 다시 말을 건네는 주체로 설정한다. 그 결과, 관람자는 남아 있는 ‘형태’보다 그 안에 깃든 보이지 않는 사건과 정서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곧, 사람의 이목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물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또한 이러한 작업은 결과적으로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계속 현행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 속적이다. 비록 작가는 특정 순간의 오브제를 포착하고, 어떤 작품에는 특정 인물의 흔적을 스케치하듯 형상화 하지만, 그것이 한 번 전시되었다고 해서 그 기억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작품과 마주하는 순간마다, 관람자는 저마다의 시각과 맥락을 통해 그 파편에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한 시위가 끝나고 남겨진 도 구를 보고 어떤 이는 정치적 투쟁의 열기를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개인적 경험—예컨대 군중 속에서 느 꼈던 소외감—을 소환할 수 있다. “오려낸 기억”이라는 개념은 이렇듯, 작가와 관람자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서사의 장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과거의 사건을 한 차례 수집·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역동적 과정을 담아낸다.
결국 이지웅의 회화·설치는, 겉보기엔 낡은 사물이나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잔재들이지만, 그 배경에 깔려 있 는 수많은 서사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들며, 관람자로 하여금 ‘나만의 기억’을 되살리도록 부추긴다. 이처럼 잘 드러나지 않았던 파편들이 모이고 재배열되는 현장은, 데리다의 해체론이 말하는 ‘중심을 흔드는’ 사례이자, 낭 시가 말하는 공동체의 잔존을 현재로 끌어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과거가 마치 끝나 버린 타임라인처럼 보이지 만, 실제로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고, 그 흔적이 오늘의 시선이나 상황을 만나면 또 다른 문맥 을 생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리하여 작품 속 물건들이나 공간은 단순히 소비된 유물이나 폐허 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생생한 접면이 된다.
“오려낸 기억”은 과거를 상기시키면서도 현재의 시각과 해석을 끊임없이 유도하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관람자가 더 오래 머물며 작품을 곱씹을수록, 작품 속 파편과 자신의 내면적 기억이 더 깊이 연결되어, 서로 다른 해 석과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이 지점에서 예술의 역할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출발해 늘 ‘지금 여기’를 변모시키는 창조적 행위임이 명확해진다.
이지웅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끝나지 않은 사건으로서의 기억”이다. 기억은 고정된 과거의 기 록이 아니라 현재와의 만남을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그의 작업은 일상 의 주변부나 사소함 속에 잠복해 있는 무한한 이야기의 잠재력을 일깨우며, 과거의 흔적이 언제든 불씨가 되어 현재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지웅의 작업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나 ‘회상’이 아닌, 사물과 이미지가 다시 태어나는 ‘재생성의 서사’로서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지점을 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