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선
YOUN Julie Insun

b.1979

현실 이동 대기열  | 2025 | 접착 시트에 디지털 프린트 | 380×135cm

거울 파동  |2024 | 아크릴에 UV 프린트 UV print on plexiglass | 60×70cm

일시적 트랜스 Transient Trance | 2024 | digital print on paper | 90×90cm

Biography

  • 2017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박사
  • 2011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 스튜디오 아트 석사
  • 2005 홍익대학교 회화과·예술학과 학사
  • 2017 Hongik University, Visual Arts, PhD
  • 2011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Studio Art, MFA
  • 2005 Hongik University, Painting, BFA·Art Studies, BA

Exhibition

  • 2024 개인 <낮은 견학 Low Field Trip>, 상업화랑, 서울
  • 2025 단체 <사이의 숨결 Breath Between>, 동빈문화창고1969, 포항
  • 2024 단체 <BOTH>, PS CENTER, 서울
  • 2024 단체 <즉석 트랜스 Instant Trance>,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서울
  • 2021 단체 <피어서 Piercer>, SeMA창고, 서울
  • 2024 Solo <Low Field Trip>, Sahngup Gallery, Seoul
  • 2025 Group <Breath Between>, Dongbin Cultural Platform, Pohang
  • 2024 Group <BOTH>, PS CENTER, Seoul
  • 2024 Group <Instant Trance>, Platform-L Contemporary Art Center, Seoul
  • 2021 Group <Piercer>, SeMA Storage, Seoul

Critique

구원을 위한 대기열 – 직조, 연결, 구성, 매듭의 패턴에서

윤태균(미술평론가)

 

차가운 데이터의 세계에서 지극히 정신적인 순간을 도출해 낼 수 있는가? 윤인선 작가와의 대화는 그의 작업 형식이 취하는 기술적 외피와 그 세련됨, 그리고 그 형식에 가해지는 통속적인 선입관을 제거할 기회였다. 오늘날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여러 작업이 손쉽게 테크놀로지-예술의 대중적 이미지를 택하여 자신의 명료하지 않은 SF적 세계관을 포장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선입견은 작업에 접근하는 입장에서도, 그리고 작업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반면 윤인선의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를 다룬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디지털 이미지의 생성 과정이 수반하는 그 수행적 노동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작업은 회화의 형식을 취하지만, 이미지는 디지털로 제작된다. 작가는 벡터 그래픽 툴을 사용하여 여러 형상들을 잇고 조직하며, 분류하고 분리하며, 또 섞고 반복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 수행적 노동은 사전에 설정된 계획이나 도식을 따르지 않고 다소 즉흥적이며 또 어떤 측면에서는 자동기술법(Automatism)과 같이 의도가 결여된 상태로 진행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를 하나의 제의(ritual)로 삼는다.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논의는 주로 그 가변적 유통 방식, 해상도, 맥락의 빈약함, 손쉬운 편집 방식 등을 두고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오래된 통념이 (아직도) 디지털 이미지의 본원이자 숙명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디지털 이미지에는 ‘무게’가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데이터와 동격이며 그 시각적 요소는 디스플레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의해 처리된 결괏값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미지라 부르는 것은 실은 감각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패턴들의 중첩이다. 그렇다면 그 패턴은 어떻게 조직되는가? 디지털 이미지 또한 데이터의 (비)연속적 조직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프로그래밍과 이미지 생성의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밀한 ‘정렬’과 ‘직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프로그램과 이미지의 생성은 모두 집약적 노동을 요구한다. 예컨대 1960년대 NASA에서 달 탐사를 위한 ‘아폴로 계획(Apollo program)’에 사용된 ‘코어 로프 메모리(Core Rope Memory)’는 실제로 여성 노동자들이 구리 선을 직조하고 매듭지음으로써 생산되었다. 알고리즘의 논리 구조가 구리 선의 얽힘으로 치환되었기에, 당시 코드를 쓰는 일은 눈앞에 놓인 실의 매듭을 따라가는 행위와 같았다. 프로그래밍 언어로 시행되는 코딩 또한 고유한 구조적 통사론으로 패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수공예적 노동을 요구한다. 프로그래밍 혹은 코딩을 수행하는 개체가 전통적 인간 지능에서 인공지능으로 이양되고 있는 자동화 사회에서도, 노동의 주체만이 비인간으로 전환되었을 뿐 그 노동집약적 과정은 동일하게 요구된다. (인공지능이 오히려 방대한 데이터 세트를 다룬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는 더 무거운 노동을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디지털) 이미지를 직조하는 오랜 과정, 그리고 그 노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떤 정신적인 상태는 역설적으로 오래된 예술적 태도와 결부된다. 이 오래된 예술적 태도란 바로 예술이 제의적 실행과 동의어였을 때의 그것이다. 작가는 이 제의를 통해 일종의 ‘트랜스(trance)’, 즉 무아의 경지에 다다르고자 한다. 트랜스는 분명 금욕과는 거리가 멀다. 뇌의 시냅스가 폭주하든, 감각 수용체가 외부 감각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든, 과잉의 상태이다. 그 신경생물학적 상태의 기전은 다양할 테지만, 작가에게 이 트랜스 상태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순간이 ‘정지’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트랜스는 신화적이고 신비한 순간이라기보다 테크노-생명-삶의 구체적인 피드백과 그 신호의 폭주에서 오는 ‘서지(surge)’이다. 서지는 회로의 작동을 일시적으로 멈춘다. ‘서지’는 회로에서 전압 및 전류가 급격히 상승하는 현상을 일컫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학에서는 ‘화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즉 사망 직전 일시적으로 원기를 되찾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또, 선불교에서는 ‘외부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는 본래의 빛을 비추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뜻이다. 단어의 언어인류학적 의미 관계를 살펴보려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지면에서는 단지 감각과 (예술 생산) 노동의 장에서 재귀와 과잉의 역학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과잉-트랜스의 상태가 어떻게 종교적 구원과 맞닿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잉-트랜스-서지, 그리고 그 폭주가 야기하는 연속적 의식의 정지는 곧 ‘구원’이다. 이때 구원이라는 말은 노동의 과잉, 감각의 과잉, 형식의 내파에서 오는 그 초과의 순간이 하나의 (현시적) 이미지 안에 밀집되어 발생하는 폭발의 순간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트랜스 상태, 정지 상태를 통해 작가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구원한다는 것인가? 그 정지된 순간으로서 이미지를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유가 긴장으로 가득 찬 하나의 구성체 속에서 갑자기 멈추게 될 때, 사유는 그 구성체에 하나의 충격을 가하게 되며, 이 충격을 통해 사유는 단결정(Monade)으로서 결정화된다. […] 역물질주의적 역사가가 역사적 대상에 접근하는 것은 그것이 메시아적 정지의 단편으로서 […] 나타날 때이다.”1)  작가가 이미지를 직조하며 발생하는 트랜스 상태는 일상적 삶, 그러니까 이미지의 끊임없는 유통과 그것을 비판 없이 전유하는 예술의 몇 행태들, 그리고 자동화된 데이터 생산-소비의 경제라는 연속적 흐름을 끊어내는 충격이 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진실이, 사유가 돌연 멈춰 서는 그 ‘정지’의 찰나에 비로소 하나의 이미지로 결정화되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프(stripe)를 기조로 하는 기하학적인 그래픽이 교차하면서 특유의 셔플(shuffle) 구조를 형성하고, 시작과 끝이 하나 되는 원형적 상황이 펼쳐진다. 이 반복하고, 재배열하고, 덮어쓰는 이미지의 세계는…(중략)…”2)

 

윤인선의 회화는 세 층위에서 동시에 구원을 추종한다. 여기서 윤인선의 회화가 추구하는 ‘구원’은 세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첫째는 회화 자체의 구원이다. 회화의 절대적 매체성으로서 평면성은 역사적 종언을 고한 듯 보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매끄럽고 평평한 영토인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벡터(vector) 편집의 영역에서 ‘사후적 반복’을 통해 부활한다. 디지털 이미지 벡터 편집과 평평한 인터페이스 기기에 의해 다시금 실천할 수 있는 특성으로 귀환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평면성과 자율적 매체성이 모더니즘의 그 독단적 역사의 끝에서, 자신에게 덮인 동시대의 무덤을 걷고 그대로 부활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회화성을 다시 독해한다. 디지털 작업 환경, 특히 벡터(vector) 기반의 편집은 수학적 좌표 위에 놓인 평면을 기반으로 한다. 픽셀이 뭉개지는 비트맵과 달리, 벡터는 무한히 확대해도 그 정교한 선과 면의 평평함을 유지한다. 또한 우리가 정보를 접하는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매체 역시 완벽하게 매끄럽고 평평한 장치이다. 작가는 이러한 디지털의 특성을 통해, 과거 캔버스 위에서 수행되던 평면성에 대한 탐구를 반복하여 회화의 자율적 지위를 다시금 확보한다. 물론 회화의 선형적 역사-모더니즘에 기반한 독선적 질주는 아닐 테다. 다만 여전히 호사가들에 의해 죽음을 선고받는 회화를 믿는 사람으로서 메시아적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기다림 자체가 사실 구원일지 모른다) 둘째는 디지털 기술의 본래적 잠재성을 일깨우는 구원이다. 본래 디지털 데이터는 인간에게 무관심한 패턴에 불과하지만, 인터페이스를 통해 아날로그로 전환될 때 비로소 인간의 감관을 자극하는 ‘이미지’라는 상이 맺힌다. 바타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제의적 예술의] 형상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들이 지닌 목적들과 같은 물질적 목적들을 초월하는 전혀 다른 양상들이 존재했다…”3) 앞서 강조했듯 디지털 이미지는 본래 데이터의 패턴이다. 그것을 시각적으로 번역하여 인터페이스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여 비로소 ‘이미지’라는 상이 되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수적인 현상들이 생겨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미학’ 혹은 ‘감성학’ 이라 부르는 (인간적) 감성의 구체적인 작용들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 예외의 영역을 전유한다. 고대 제의적 예술이 물질의 사전 설정된 목적을 초월했던 것처럼 기계적 알고리즘을 예술적 숭고의 통로로 전환하는 것이다. 목적 없는 수행은 기술을 단순한 수단에서 미학적 주체로 격상시킨다. 마지막으로, 수행으로서의 예술 노동이 획득하는 구원이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 노동을 과잉 시켜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끊어내고 정지의 순간을 포착한다. 탄생하는 이미지는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하는 폭발적인 힘을 내장한 정지된 파편이 된다. 결국 작가에게 디지털 회화란 기계적 합리성이 마비된 지점에서, 수행적 노동의 과잉으로 발생하는 서지의 순간이다.

하지만 구원은 우리를 이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영속적으로 탈출시킬 수 있는가? 구원의 순간은 영원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지극히 짧고 덧없다. 만약 구원이 영속적인 상태라면, 그 이후의 삶은 끝없는 트랜스의 황홀경에 함몰되어 더 이상의 사유도 노동도 불가능한 폐허가 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단순히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형적 흐름으로 파악하는 통속적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은 극도의 긴장과 속도가 임계점에 도달해 파열음을 내는 ‘서지(surge)’의 연속으로 서술된다. 예술적 구원은 이 시간의 틈새에서 번뜩이는 찰나의 사건이지, 안주할 수 있는 영토가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 윤인선이 자신의 이미지 세계를 “대기열(queue)”이라 명명한 점이 인상적이다.4) 대기열은 목적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처리를 기다리는 데이터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정체된 상태를 의미한다. 작가의 수행은 도래하지 않은 구원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시간인 것이다. 이때 ‘믿음’은 지연되는 구원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기제로 작동한다. 비록 그 구원이 끝내 도달하지 않을 헛된 것일지라도, 혹은 그 구원이 단 한 번의 섬광으로 사라질 헛된 환상일지라도, 보편성을 향해 자아를 내던지는 이 광신적 투신만이 예술가로 하여금 대기열이라는 정체된 시간을 신성한 제의의 현장으로 전유하게 만든다. 결국 구원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기다림의 과정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예술의) 보편성을 향한 믿음은 노동의 대기열을 신성한 제의의 현장으로 바꾼다. 이러한 믿음의 과정 자체가 예술에는 실질적인 구원이 된다. 따라서 작가의 노동은 사라져 버릴 섬광을 단 한 번이라도 포착하기 위해 자신을 대기열에 세우는 일이다. 구원은 전진하는 시간 속에서 단결정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찰나의 충격이다. 작가에게는 이 대기열의 시간이 디지털 회화가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치열한 존재의 방식이자, 찰나의 구원을 영원으로 번역해 내는 유일한 통로이다.

1)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파리, 19세기의 수도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외』, 최성만 (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08, pp. 348-349.

2) 윤인선, 작가 노트.

3) 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차지연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7, p. 127.

4) 윤인선, ibid.